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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폭군으로 알려진 광해군의 업적

by 게으른 배트맨 2023.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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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폭군으로 알려진 광해군의 업적

 

게으른 배트맨입니다.

 

배트맨 날다

인생의 전환점을 찾아..... 한가지라도 바지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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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시절 좋은 왕이 될 것이라는 평가를 받던 광해. 그는 왜 역사에 남을 폭군이었을까?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에게 세자책봉에 밀렸을 때 그의 심정은 어땠을지.... 그 후 왕위를 물려받은 후 '역모'의 투서가 들어오면서 광해는 난폭해지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런 배경은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기에 오늘은 조선 15대 왕인 광해군의 업적에 대하여 포스팅하고자 합니다.

 

 

광해군의 모
광해군의 묘

 

조선 15대 왕 광해군과 대동법

조선 15대 왕인 광해(광해군)는 조선시대에 많은 법령과 정책을 제정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대동법"입니다. 이 법령은 1598년에 제정되었으며, 조선사회의 사회적 질서와 경제 발전을 위해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임진란 당시 분조활동을 펼쳐 일본군에 저항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광해군의 대동법

광해군은 대동법을 실시하여 전국의 토지가 황폐된 임진왜란으로 인한 국가 재정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키려는 개혁을 진행했습니다. 이 개혁은 중앙 정부에 선혜청을 설치하고 경기도에 경기청을 두어, 경기도부터 시작하여 방납의 폐해가 가장 큰 지역부터 진행되었습니다.

대동법은 공물을 호(戶) 단위로 징수하던 것을 대동미, 즉 1 결당 쌀 두수로 환산하여 걷었습니다. 세율은 봄가을 2기로 나누어 땅 1 결(結)에 대해서 8말씩 도합 16말을 징수하였으며, 그중 10말은 중앙의 수요에 충당하기 위해서 선혜청에, 나머지 6말은 경기청에 두어 경기도의 수요에 충당하였습니다.

국가에 의해 징수한 대동세의 일부는 중앙 정부로 상납되었으며, 이를 상납미라고 합니다. 선혜청은 상납미의 확보를 위해 노력하였고, 나머지는 지방에 유치하여 지방 관아의 경비로 사용되었으며 이를 유치미라고 합니다. 시일이 지날수록 상납미의 비율은 높아지고 유치미의 비율은 낮아졌습니다. 이는 지방 관아의 재정 악화와 수령 및 아전들의 농민 수탈이 재발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 개혁제도의 실효성이 입증되자 차츰 각 지방에 확대 적용되었으나, 1623년 인조가 인조반정으로 등극한 후 충청도와 전라도의 대동법은 폐지되었습니다.

"대동법"은 조선 15대 왕 광해군 시기에 제정된 법령으로, 사회 질서와 경제 발전, 도덕적 행동 규율 등 다양한 측면에서 조선사회를 조직하고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광해군과 의병장들의 분조활동

광해군은 영의정 최흥원(崔興源, 1529년 ~ 1603년)을 비롯해 분조에 남은 중신 10여 명을 이끌고 활발한 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들은 평안도 맹산·양덕, 황해도 곡산을 거쳐 강원도 이천에 자리를 잡아 적군을 교란하였습니다.

이 지역에 일본군의 위협이 가까워짐에 따라 광해군은 다시 황해도와 평안도 성천을 거쳐 영변에 머물며 분조를 이끌어갔습니다. 이때 광해군은 각 지역에서 고군분투한 의병장들과 장수들에게 사람을 보내 상을 내리고 관직에 임명하는 등 그들의 공을 격려하였습니다.

일본군이 서울을 물러난 뒤에도 광해군은 각지를 다니며 군과 백성을 격려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데 힘썼습니다. 또한 분조의 의용대는 일본군 공격에 앞장서면서 대일항전의 의지를 불태우게 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우리가 방송에서 접하였던 '광해군'. 시청률을 노린 탓일까요? 폭군으로만 알고있던 선입견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피난길에서도 전쟁에 맞서 활동하였다는 '광해군'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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