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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 양녕대군의 성 스캔들

by 게으른 배트맨 2023.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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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 양녕대군의 성 스캔들

게으른 배트맨입니다.

 

배트맨 날다

인생의 전환점을 찾아..... 한가지라도 바지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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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의 장남 양녕대군. 그는 왜 왕세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는가?

조선의 4대 임금으로 등극이 자명하였지만 결국 그는 여색에 무너져 내렸다.

이 시간에는 양녕대군의 왕세자 폐출 배경을 알아보겠습니다.

 

 

양녕대군-드라마
양녕대군-드라마

 

태종의 자녀

태종은 원경왕후와의 사이에서 4남 4녀를 두었고, 효빈김 씨 등 18명의 후궁에게서도 8남 13녀라는 많은 자녀를 얻었습니다(그밖에도 일찍 사망한 2녀가 있었습니다). 이런 비빈과 자녀의 숫자는 그의 호색을 보여주는 객관적 증거지만, 전근대의 국왕은 개인적 욕망을 해소하는데 현실적 제약을 거의 받지 않았을 것을 생각하면 현재의 기준에 비추어 그것을 통치의 성패나 인격의 수준과 연관시키려는 시도는 무의미할 것이다.

양녕대군은 이런 많은 자녀 중에서 정비의 장남으로 태어나는 큰 행운을 누렸다. 1394년(태조 3)에 태어났을 때 아버지 이방원은 정안대군이었지만, 6년 뒤 조선의 제3대 국왕으로 등극했다. 양녕대군에게 이런 변화는 수많은 왕자군에서 독존의 지위를 예약하는 엄청난 행운의 도래였다.

 

양녕대군의 성스캔들

세자 양녕대군을 폐출로 몰고 간 결정적인 사건은 어리라는 여인과의 염사였다. 그녀는 전 중추 곽선의 첩이었는데, 세자가 그녀와 간통했다는 사실이 발각된 것이었다(1417년 2월 15일). 태종은 대노했고 세자를 장인 김한로의 집으로 쫓아 보냈다(2월 17일). 세자는 즉시 개과천선하겠다는 긴 맹세의 글을 종묘와 부왕에게 올렸다. 태종은 세자가 허물을 뉘우친다면서 그날로 환궁하라고 용서했다. 연루된 구종수와 이오방 등은 참수되었다.

세자가 이때 진정으로 반성하고 동일한 과오를 반복하지 않았다면, 그는 결국 조선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양녕대군은 같은 문제를 다시 일으켰고, 이번에는 결정적인 과오를 저질렀다. 그것은 항명이었다.

이듬해 세자는 어리를 다시 불러들였고, 이번에는 아이까지 갖게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1418년 5월 10일). 태종은 다시 분노했고, 세자의 출궁과 알현 금지를 명령했다. 장인 김한로도 직첩(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아치의 임명장)을 빼앗기고 죽산(지금 경기도 안성)에 부처되었다.

세자는 자신에게 내린 부왕의 처벌이 부당하다는 반론을 직접 작성해 올렸다(5월 30일). “이 첩 하나를 금지하다가는 잃는 것이 많고 얻는 것은 적을 것이며, 이제부터는 조금이라도 새 사람이 되어 부왕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 요지였다.

 

태종 충녕(세종대왕)을 책봉하다

세자를 교체해야겠다는 태종의 결심은 이 시점에서 거의 굳어졌다고 판단된다. 국왕의 심중을 파악한 의정부ㆍ삼공신ㆍ육조ㆍ삼군도총제부ㆍ각사 등 거의 모든 주요 신하들은 폐세자를 주청 했다(6월 2일). 태종은 양녕대군의 아들 중에서 왕세손을 선정하려고 했지만 영의정 유정현 등은 어진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튿날 태종은 결국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충녕대군을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했다(6월 3일). 태종의 많은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세종을 후사로 결정한 것이라는 평가도 있듯이, 이것은 그야말로 조선의 운명을 결정한 중대한 선택이었다.

택현 : 어진사람을 고름

참조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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