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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보다 더 친일 윤덕영과 벽수산장

by 게으른 배트맨 2023.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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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보다 더 친일 윤덕영과 벽수산장

 

게으른 배트맨입니다.

 

배트맨 날다

인생의 전환점을 찾아..... 한가지라도 바지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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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가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병풍 뒤에서 숨어서 몰래 듣고 있던 순정효황후가 옥새를 들고 울면서 도망치다가 앉아서 치마 속에 숨기는 등 온몸을 던져 항의했고 그 누구도 황후의 몸에 손을 댈 수 없자 큰아버지 윤덕영이 나서서 빼앗았다. 이로써 조선은 공식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고종과 순종을 협박해 왕실을 움직여 조선의 식민지화에 일조한 윤덕영은 그 대가로 자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그때 받은 것 중 하나가 벽수산장이다.]

 

윤덕영
윤덕영

 

윤덕영의 친일 행적

윤덕영은 조카가 황후(순정효황후)가 된 다음 해인 1908년 시종원경이 되었고 황후의 태부도 겸하였는데 이로 인해 궁중은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황후의 아버지인 윤택영이 있었지만 실제로 황후를 등에 업고 외척 세도를 부리며 정치에 깊숙이 관여한 것은 윤덕영이었다.

 

이완용은 고종에게 7일간 조석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면서 결단을 촉구하고 설득을 했지만, 고종은 대꾸도 하지 않고 꿈쩍하지 않았다. 이런 고종의 단호함에 이완용은 포기를 하고 돌아갔고 이에 일본이 실망했다고 한다. 이 때 윤덕영이 본인이 직접 나서겠다고 하여 고종에게 찾아가 부탁을 했지만 역시 고종이 들은 척도 하지 않자 협박하기 시작했다. 덕수궁 모든 창고에 봉인(압류)을 붙이고 물건을 관리하던 상궁도 내쫓았는데 고종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윤덕영은 고종의 과거 여자 문제로 협박하기 시작했다. 단호하고 대꾸조차 하지 않던 고종이 주저앉으면서 시선을 피하자 윤덕영이 고종 앞으로 가서 서서 말하기를 "청을 들어주실 때까지 안 움직이겠습니다."라며 오후 2시부터 새벽 3시까지 서 있었다고 하는데 고종은 차마 그럴 수 없다고 순종을 보냈다. 윤덕영의 집착과 집요함에 두 손을 든 고종은 순종에게 만나게 했는데 옛 신하로서의 정이나 예의라고는 안중에도 없는 태도가 상궁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고 한다. 일본인들조차 윤덕영의 냉혹함과 집요함에 치를 떨었는데 지금까지 그 욕을 다 먹는 건 이완용이다.

 

 

벽수산장
벽수산장

 

윤덕영과 벽수산장

1917년 이완용이 고종에게 도쿄로 가서 다이쇼 덴노에게 "(한일합방) 고맙다고 직접 말해라"라고 하자 고종이 "난 그 짓 절대 못 한다!"라고 반항하자 보다 못한 윤덕영이 이왕가의 재산들에 직접 빨간딱지를 붙이고 궁인들에게 "이거 때면 가만 안 둔다"라고 엄포를 놨다.  이에 대해서 윤치호가 말하길. "저자의 친일은 영어로 뭐라 표현할 수가 없다."고 평할 정도였다.

친일파 중 가장 재산이 많은 사람은 윤덕영인데 옥인동의 약 54%, 지금의 서촌 부지, 수성동 계곡, 배화여자고등학교, 인왕산 자락까지 모두 다 윤덕영의 집터였으며 아직도 그곳에는 흔적이 조금 남아있다. 집 안에는 능금나무밭, 자연숲, 한옥 99칸, 하천이 있는 총 "2만 평"의 대저택이며 이완용 땅의 4배인 "19,467평"(축구장 8개의 면적)이다.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백성들의 피, 땀, 눈물로 만들어진 곳. 1921년 6월 23일에 보도된 <동아일보> 기사에 '조선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집'이라고 소개된 곳이 바로 이 '벽수산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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