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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 원인 및 배경

by 게으른 배트맨 2023.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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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전환점을 찾아..... 한가지라도 바지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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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조선정치에 깊이 개입하고 들어온 일본을 외교적으로 러시아를 동원하여 조선에서 축출하고자 했다. 이에 일본은 명성황후를 제거하기에 이르렀다. 일명 ‘여우사냥’으로 불린 명성황후의 시해시도였다. 일본은 자신들이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는 데 가장 방해요소로 왕비였던 명성황후를 지목하고 제거하고자 하였다.

 

 

명성황후 초상화
명성황후 초상화

 

을미사변

1895년 10월 8일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시를 받은 일본군 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와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을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 이 사건 이후 친일 내각에 의해 단발령과 건양 연호의 사용, 군제 개편, 소학교령 공포, 태양력 사용 등의 개혁정책이 시행되었으나 황후 시해에 대한 국민들의 반일감정에 의해 전국적인 반일의병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명성황후와 일본의 대립 배경

1895년 3국 간섭 이후 한국정부 내에서 이완용·민영환·윤치호 등 소위 '정동파'들은 명성황후의 세력을 앞세워 친러·친미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일제는 세력만회를 위해 7월 13일 이노우에 대신에 군국주의 군벌인 미우라를 주한공사로 임명했다. 한국정부는 10월 민영환을 주미전권공사로 임명하는 한편, 일본군 장교가 훈련시키던 훈련대를 해산하고 미군장교 다이가 훈련시킨 시위대를 중용하기로 결정했다. 또 친일계인 어윤중·김가진을 면직시키는 대신 친러계 이범진을 등용하는 등 배일정책을 더욱 추진했다.

 

 

명성황후 시해
명성황후 시해

 

명성황후 시해

훈련대의 해산으로 다급해진 미우라 등은 명성황후 시해 예정일이었던 10월 10일을 앞당겨 10월 8일 새벽에 행동을 개시했다. 일인들은 우선 대원군에게 가서 고유문을 결재받고, 서대문에서 훈련대 병사들과 합류하여 광화문에 도착했다. 여기서 폭도들은 훈련대연대장 홍계훈을 죽이고, 왕궁을 호위하던 다이 지휘하의 시위대들과 교전하여 패배시켰다. 폭도들은 고종과 중전의 침소인 건청궁에 난입하여 고종에게 미리 준비한 명성황후의 폐출조서에 서명을 강요하며 위협했다.

그러나 고종이 이를 거부하자 황태자에게 칼을 휘두르는 등 극악한 만행을 저질렀다. 이어 궁내부대신 이경직을 살해한 뒤,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를 무참하게 시해했을 뿐만 아니라 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신을 화장하는 야만적 행동을 저질렀다.

 

 

을미 의병

1895년 8월 20일 일본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를 접한 유생들은 명성황후의 폐위에 반대하고, 친일내각의 타도와 일본세력의 축출을 목표로 의병운동을 일으킬 움직임을 보였다. 1896년 1월 경기도·강원도·충청도 일대에서 의병이 일어났으며, 2월 아관파천 후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이 활발했다.  단발령은 의병운동을  더욱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을미의병의 지도층은 유생들이었으며, 병사는 농민전쟁을 경험한 농민이나 소작농민이 대부분이었다. 을미의병의 당면 목표는 단발령을 철폐하고 친일내각을 퇴진시킨 다음 일본군을 축출하는 것이었다. (자료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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