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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정승의 생애와 정년퇴직

by 게으른 배트맨 2023.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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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정승의 생애와 정년퇴직

 

황희정승
황희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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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 날다

인생의 전환점을 찾아..... 한가지라도 바지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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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3년(공민왕 12년) 개성부 가조리(可助里)에서 자헌대부 황군서와 용궁 김 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종실록에 기록된 이호문(李好問)의 사초에 따르면 얼자라고 하는데, 적어도 정실 소생이 아니라는 것만은 평소에 본인이 말하고 다녔기 때문에 당대에 이미 알려져 있었다.

황희정승은 정 9품 말단으로 시작하여 정승으로 품위 되기까지 수많은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황희정승의 공직생활

황희정승은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년) 음서로 14살에 품계가 없는 녹사(錄事)에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389년 문과 대과(大科)에 급제하고 1390년 정 9품 성균관 학록(學錄)이 되었다.

이후 조선 태조와 정종 대에는 자신이 볼 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임금의 명령이라도 거부하는 완고함 때문에 여러 번 파직되어 관직 생활이 평탄하지 못했다. 태종이 즉위하고 지신사 박석명의 천거로 1401년 도평의사사 경력, 1402년 대호군 겸 승추부 경력이 되더니 1405년 박석명의 후임으로 지신사가 되면서 관직 운이 트이기 시작했다. 태종은 황희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서 4년 동안 지신사직에 두어 크게 중용했다. 지신사는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시행을 감독 및 보고하던 대언(代言)의 으뜸으로, 도승지의 전신이며 지금의 대통령비서실장이다. 국왕 직속인 만큼 권력뿐만 아니라 업무 강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자리로 유명하다.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났던 태종에게 이 정도로 중용받을 정도면 능력은 입증된 셈. 소위 코드 인사로 인해 일부 관료의 인망을 잃은 것도 이때의 일이다.

이후 이조, 호조, 예조, 형조, 병조, 공조판서직을 모두 역임했다. 다만 당시는 현대만큼 사회가 복잡하지 않아 한 부서가 담당하는 일의 폭이 훨씬 넓었다. 지금과 비슷하게 부처가 나누어진 것은 갑오개혁과 대한제국 선포 이후의 일이다. 도승지와 6조 판서와 영의정 모두 지냈다는 것은 지금으로 따지면 대통령 비서실장, 행정각부 장관, 국무총리까지 지냈다는 말이다. 이처럼 국정 전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어 크게 신임을 받았다.

 

 

황희정승의 위기

적장자 계승 원칙을 고수하며 양녕대군을 두둔하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 관직에서 파직된 뒤 유배까지 갔다. 태종은 '민 씨들에게 미움 산 것'을 만회하고자 세자 편을 들었다며 비난했고, 황희는 단순히 세자가 너무 가여워서 그랬다고 변명하였다. 태종은 황희가 자기의 신뢰를 저버렸다고 생각하여 실망하고 황희를 시골로 내쫓았다.

'민 씨들에게 미움 산 것'은 민무구, 민무질 등의 옥사를 가리킨다. 당시 조정에서는 지신사 시절의 황희가 민 씨 집안을 박살 낸 장본인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러한 극비 정치 사안을 함께 의논할 정도로 태종의 신임을 받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이유로 지금의 경기도 파주에 있는 교하(交河)로 유배를 갔다가, 한양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유배지가 지금의 전라도 남원으로 변경되어 5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이것도 황희의 향관이 남원이었기 때문에 약간 배려한 것. 황희는 노모와 처자식을 데리고 남원에 가서 머물렀다. 이 시기 황희가 지은 광통루라는 누각이 현재의 광한루이다.

평소 황희를 아끼고 높이 평가한 태종이었기에,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고 군권만 행사하는 상왕으로 물러난 후 1422년 세종에게 조정으로 다시 불러들일 것을 권유하면서 재출사 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조정으로 돌아온 후 세종에게 중용되어 강원도의 기근을 해결하는 데 공을 세웠고, 1426년(세종 8) 우의정에 오르면서 정승의 반열에 올랐다. 1427년(세종 9) 좌의정이 되어 수상으로서 국정을 총괄하게 되었다. 1431년(세종 13) 원래 영의정부사였다가 늙어서 본직을 내려놓고 부원군으로서 정치에 참여하던 이직이 죽자 영의정부사가 되었다.

황희정승의 업무능력

1427년(세종 9)부터 1435년(세종 17)까지는 황희와 맹사성의 투톱 체제로 유명하다. 황희는 보수적이고 강직한 스타일로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나간 면이 있었던 세종의 브레이크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대국을 보는 시각이 뛰어났고 당대에 알아주는 군자로 범죄 사건에도 너그러움을 위주로 처리했다.

강직, 분명, 정확한 스타일의 인물로 주로 추진력과 결단력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다. 강한 결단력, 추진력과 6조 판서직을 모두 수행하면서 축적된 노하우가 결합되어 정책 회의 때마다 주목할 만한 의견을 자주 냈고 복잡한 토론을 거쳐도 결국 황희의 안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원만한 성품의 동료 정승 맹사성은 황희의 이런 강직함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고 주로 융통성과 센스가 필요한 일처리에 능한 편이었다.

사관은 《조선왕조실록》에 황희의 졸기(卒記)를 남기면서 '일을 의논할 적엔 정대(正大)하여 대체(大體)를 보존하기에 힘쓰고 번거롭게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라고 평했다. 그는 정책에 있어서 대체로 보수적인 시각을 견지하고는 했는데, 이런 그의 능력이 세종에게 가장 필요하였다. 세종은 스스로 독창적인 주장을 내기도 했고 가능한 모든 논점을 검토한 뒤 정책을 결정했기 때문에 정책의 완성도는 높았지만, 그 과정에서 무리한 정책도 종종 나왔으며 온갖 주장이 난립하여 심의가 길어져 쟁점들 사이에서 균형을 잃을 수 있었다. 여기서 황희는 대국적으로 주장을 정리하고 가장 현실적인 시행 방안을 내어 정책을 조정했다. 황희가 온갖 문제를 일으켰음에도 세종이 괜히 그를 끝까지 부려먹은 게 아니다.

 

황희정승묘-파주
황희정승묘 파주

황희정승의 정년

1449년(세종 31) 모든 벼슬에서 물러나기까지 18년간 영의정에 있으면서 세종을 훌륭히 보좌하여 농업, 예법, 군사, 법률 등 각종 국정에서 세종의 정치 고문이자 명재상으로 많은 업적을 남겨 명성을 떨쳤는데 벼슬살이만 73년을 했다.

 

그는 조선의 영의정이지만 '영의정부사'가 최종관직이다. 세종이 끝까지 황희를 놓아주지 않는 대신 지금의 '재택근무'격인 품위를 내려준 것이 '영의정부사'이다. 세종은 황희정승이 물러난 후 4개월 후 세상을 하직하였다.

 

다음시간에는 왜 그토록 세종이 황희를 놓아주지 않았는지... 황희정승의 업적에 대해 포스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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