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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

by 게으른 배트맨 2023.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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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

 

네타냐후의 정치

하버드 경영대학원 재학 중에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도 수학했으나 형 요나탄 네타냐후가 엔테베 작전 중 사망함으로 인해 정치학 박사과정을 마치지 못했다.

MIT 졸업 후 보스턴 컨설팅 그룹(BCG)에서 근무하였다. 이때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버락 오바마에 대항할 밋 롬니를 BCG 동료로 만나 친분을 쌓았다.

1982년에는 워싱턴의 주미 대사관에서 근무하였고, 1984년 ~ 1988년 주 UN 대사를 지냈다. 1988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이츠하크 샤미르 정권에서 각료로 재직하였다.

1993년 리쿠드 당수로 선출되었으며, 1996년 총선을 맞이하게 되었다. 총선에서는 동시에 총리를 별도로 직선으로 뽑도록 되어 있었다. 총선 직전 팔레스타인의 소행으로 보이는 테러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그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초강경 정책을 실시할 것을 내비치며, 온건파인 시몬 페레스 당시 총리를 공격하였고, 결국 그는 페레스를 1% 포인트 차로 제치고 총리로 당선되었다. 그는 당시 이스라엘 역사상 최연소 총리였고, 또한 이스라엘 건국 이후 이스라엘 영토 안에서 태어난 최초의 총리였다.

 

 

네타냐후
네타냐후

 

네타냐후의 총리 역할

총리로 재직하면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고 야세르 아라파트와 대립하기도 했으나, 미국과 요르단의 중재로 와이리버 협정을 체결하여 영토 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협정 체결은 그를 지지하던 우파의 신임을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개인적인 문제와 부패 스캔들 등으로 구설수에 올라 1999년 총리 선거에서 이스라엘 노동당의 에후드 바라크에게 패하여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그에 따라 리쿠드의 당수직도 내놓고 잠시 정계에서 물러났습니다.

 

네타냐후의 재기

2002년 ~ 2003년 외무장관으로 재직했고, 2003년 이외에 관련하여 기소되었다. 또한 아리샤엘론이 활성화되어 리쿠드 당수직도 다시 노리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2005년 8월 9일 샤론이 아니더라도 지구촌 사람들은 정착촌 철수 계획에 반대하며 오히려 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리쿠드를 탈당하고 카디마를 창당하자 그 해 12월 리쿠드수직 다시에서 당수로 포맷, 2006년 총선에 출마했습니다.

총선 결과 리쿠닝 원내 제1당의 자리를 카디마에  에후드 올메르트가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자신이 다시 돌아온 핵시설에 선제공격을 가하는 등 초강경 우파의 행보를 이어갔다. 그 후 이스라엘 정국은 경제 위기, 집권당인 카디마의 스캔들, 가자 지구 문제 등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

비리에 연루된 에후드 올메르트 총리 이후 새 정부 구성이 존재하지 못하자, 2009년 2월, 초기 총선이 포함되었다. 가자사태가 쟁점 된 총선 기간 중에도 강경 우파 행보를 이어 가고, 그들이 호응하는 유권자들의 반응에 카디마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도 작용하여  그와 리쿠드에 대한 인기가 높았다

총선 결과 그가 이끄는 리쿠드는 카디마에 1석 차로 패했으나, 그는 에후드 바라크 전 총리가 이끄는 노동당 등과 연정을 구성하여 3월 31일 총리 자리에 올랐다. 이후 5선 연임을 하였다.

2021년 해산으로 치뤄진 총선에서 연정 구성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하마스가 동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조치에 반발해 무력으로 대응하자 하마스에 보복공격을 하여 반격 작전을 주도하였다. (2021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위기) 교전이 끝난 후, 나프탈리 베네트가 야이르 라피드와 연정 협상을 한다고 밝혀 정권을 잃을 위기에 몰렸고, 결국 실각했다.

 

이렇게 정계에서 물러나는 듯했으나, 2022년 11월 1일 열린 조기 총선에서 네타냐후가 이끄는 우파 블록이 과반 의석을 확보하면서 1년여 만에 복귀하였다. 결국 무지개 연정이 목표로 했던 네타냐후의 사법처리까지 버티지도 못하고 연정이 붕괴되면서 치러진 조기 총선에서 승리해 기회를 잡은 네타냐후가 본인의 공언대로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이다.

특히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이 다시 심화되는 상황에서 극우 성향 종교 시온주의당이 의석을 대거 늘린 상황인지라 향후 출범할 네타냐후 신 내각은 기존보다도 더 우경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 하마스 전쟁

10월 7일, 얼마 동안 직접적인 공격을 자제해 온 하마스가 별안간 '알 아스크 폭포작전'을 시행하며 이스라엘 영토에 대한 대규모 침공을 개시해 2023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발발하며 이스라엘이 안보 위기를 맞이했으나, 대신 네타냐후 개인에게는 큰 정치적 회생의 기회로 다가왔다. 위에서 언급된 사법 개혁 문제로 인한 이스라엘의 정치권 분열과 준 내전 상태라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로 불거진 혼란을 틈타 하마스가 대규모 공격을 감행한 것으로 보이며, 이후 네타냐후도 이전 같은 '군사작전'이 아닌 하마스와의 전쟁 상황임을 인정하며 '이 전쟁에서 싸워 이길 것'이라고 선언했다. 네타냐후로써는 여기서 이기기만 하면 강력한 지도자에 이스라엘의 안보를 지켜낼 총리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는 데다가, 현재 민중들은 당연히 전쟁 발발 후로는 사법 개혁문제에 관심이 끊겼고 이스라엘인들을 상대로 전쟁범죄를 자행하는 하마스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오르고 있으니 급한 불도 끈 셈이다.

 

이스라엘 하마스 전쟁
이스라엘 하마스 전쟁

 

그러나 위기를 완전히 탈출했다고는 보기 어려운 게, 전쟁 전에 

1. 모사드가 의아할 정도로 아무런 침공 징후를 잡아내지 못했다는 점

2. 이전부터 네타냐후가 정치적 생명을 연장해 온 비결인 하마스와의 '적대적 공생 관계'를 연결 지어 일부러 네타냐후가 침공 징후를 보고받았으면서도 재기의 기회를 얻기 위해 전쟁이 일어나도록 방치했다는 의심

3.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려 하마스한테 일부러 전쟁을 일으켜달라고 한 것 아니냐는 음모론

까지 도는 식으로 그 화살이 네타냐후에게도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네타냐후는 이스라엘의 수장인만큼 위의 음모론이 사실이 아니라 치더라도, 자기가 계속 하마스 상대로 도발해 대며 전쟁을 부추기다 막상 전쟁이 일어나자 초기 대응도 제대로 못한 셈이니 책임을 지게 될 수밖에 없다. 결국 하마스와의 전쟁을 앞으로 이스라엘이 얼마나 유리하게 끌어나갈 수 있을지에 네타냐후의 정치 생명이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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