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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워터게이트'... "대통령 또한 법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by 게으른 배트맨 2024.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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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워터게이트'... " 대통령 또한 법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 1974년 4월 29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하원 탄핵 조사관들에게 녹취록을 넘기겠다고 텔레비전에서 발표한 후, 백악관 테이프의 녹취록을 가리키고 있다. ⓒ AP/연합뉴스
▲  1974년 4월 29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하원 탄핵 조사관들에게 녹취록을 넘기겠다고 텔레비전에서 발표한 후, 백악관 테이프의 녹취록을 가리키고 있다. ⓒ AP/연합뉴스

 

채상병 사망사건 수사 외압 의혹에 윤석열 대통령의 직접 연루 정황이 드러났다. 지난해 여름휴가 첫날, 윤 대통령이 개인 휴대전화로 우즈베키스탄 출장 중인 이종섭 전 장관에게 1시간 동안 세 차례, 총 18분 이상 통화했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날 해병대 수사단의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 자료가 경찰에서 국방부로 회수되고, 수사단장이었던 박정훈 대령이 보직 해임 및 항명죄로 입건됐다. 

 

 

 

 

 


도대체 얼마나 긴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는 세 차례 18분의 통화를 납득할 수 없다. 이제 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그 통화 내용을 국민께 밝혀야 할 시점이다. 만약 국가 안보나 대통령의 특별한 지위(Executive Privilege)로 통화 내용 공개를 미루거나 방해한다면, 미국 '워터게이트 사건'과 유사한 상황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기시감이 든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도 같은 이유로 수사에 개입하고 사건을 은폐하려다 결국 사임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시작

워터게이트 사건은 1972년 6월 17일,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 침입한 5명이 체포되면서 시작되었다. 초기에 경찰은 이를 단순 절도 사건으로 보았다. 하지만 침입자들의 소지품에서 고성능 도청 장치와 현금이 발견되면서 연방수사국(FBI)이 사건의 배후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사건 초기 닉슨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정부 차원의 연관성을 부인하며 이를 단순한 도청 사건으로 축소하려 했다. 대선이 5개월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재선 캠프의 연관성이 드러나면 선거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중앙정보국(CIA)을 내세워 국가 안보상 중요한 문제라며 FBI에게 수사를 중단하고 사건을 CIA에 넘기도록 압력을 가했다.

닉슨 대통령의 첫 번째 실수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그는 재선 캠프의 소수 인사들이 선거 이후의 논공행상을 노리고 무리수를 둔 것이라고 솔직하게 시인하고, 관련자들이 법에 따라 처벌받도록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FBI 수사 무마와 사건 은폐를 무리하게 시도했다. 권력기관을 장악하고 있는 현직 대통령의 오만함이 큰 원인이었다.

 

사임 연설을 하는 닉슨 대통령. 위키백과
사임 연설을 하는 닉슨 대통령. 위키백과

 


사실 닉슨 대통령과 그의 백악관 핵심 참모들은 굳이 민주당 선거 본부를 도청할 필요가 거의 없었다. 민주당은 대선 후보 선출 자체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닉슨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의 프리미엄과 높은 국정지지율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베트남전 종전 협상에서 큰 진전을 보였고, 1972년 2월에는 모택동과 정상회담을 통해 중국과 소련을 갈라치는 큰 전략적 성과도 거두었다. 실제로 그해 대선에서 닉슨 대통령은 50개 주 중 49개 주에서 승리하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한 언론사 기자들의 끈질긴 추적으로 이 사건은 점차 확대되었다. <워싱턴 포스트>의 신참 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은 이 사건 배후에 닉슨 행정부가 깊이 관여했다는 정황을 파악하고 끈질기게 파헤치기 시작했다. 특히 이들에게 수사 정보를 제공하며 도와준 이는 훗날 정체가 드러난 FBI 부국장 마크 펠트였다. 두 기자의 끈질긴 탐사 보도는 국민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결국 대선 이후 의회가 본격적으로 나서는 계기가 됐다. 제4의 권력이라는 언론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대목이다.


의회 특별 청문회와 특별검사
 

▲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9월 12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입장하고 있다. 오른쪽은 당시 이종섭 국방부 장관.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 연합뉴스
▲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9월 12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입장하고 있다. 오른쪽은 당시 이종섭 국방부 장관.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 연합뉴스

 


1973년 2월, 닉슨 2기 정부 출범 한 달 후, 상원은 진상 조사를 위해 워터게이트 특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위원회가 설치되자 닉슨 대통령은 위기감을 느끼고 두 번째 중요한 실수를 범했다. 참모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책임을 회피하려 한 것이다. 같은 해 4월 30일, 비서실장과 국내 정책 수석 보좌관을 사임시키고, 백악관 법률고문 존 딘을 해고했다.

그러나 이러한 책임 면피용 해임 조치는 국민적 의구심과 의회의 압력을 더욱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상황이 더욱 악화되자, 당시 법무장관은 5월 18일에 법적 전문성과 높은 도덕성을 인정받아 온 아치볼드 콕스를 특별검사로 임명했다. 콕스는 당시 하버드 로스쿨 교수이자 민주당 행정부에서 법무부 장관을 역임한 법률 전문가였다.

이후 청문회 과정에서 닉슨의 측근들에 의한 양심 고백이 이어졌다. 4월 말 해고됐던 존 딘은 6월 25일 상원 특위 청문회에 출석해 닉슨이 사건 은폐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고 증언했고, 7월 16일에는 백악관 부비서실장이었던 알렉산더 버터필드가 닉슨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1971년 2월에 대통령 집무실, 내각 회의실, 그리고 닉슨의 개인 사무실에 음성 활성화 방식의 녹음 장치가 설치되었다고 증언했다.

이 증언은 워터게이트 조사에 중요한 전환점을 가져왔다. 그러나 녹음테이프가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다시 1년여의 시간 동안 여러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닉슨 대통령과 그의 핵심 측근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했기 때문이다.

 

 

 

 


비밀 녹음테이프가 공개되기까지
 

▲ 2022년 6월 17일 미국 워싱턴 DC 워터게이트 호텔의 '스캔들 룸'에 전시된 1970년대 유물. 이 방은 1972년 6월 17일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가 침입했을 때 망루로 사용되었다. ⓒ EPA/연합뉴스
▲   2022년 6월 17일 미국 워싱턴 DC 워터게이트 호텔의 '스캔들 룸'에 전시된 1970년대 유물. 이 방은 1972년 6월 17일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가 침입했을 때 망루로 사용되었다. ⓒ EPA/연합뉴스

 

 
상원 워터게이트 특별위원회와 특별 검사는, 버터필드 증언 10일 후인 7월 23일, 대통령실에 녹음테이프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닉슨은 대통령 특권을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대통령 권한을 제한하는 나쁜 선례를 남길 것이라는 점과, 테이프에 국가 안보와 외교 문제 등 민감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공개하면 대통령직 수행에 지장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도 덧붙였다.

그러나 특별검사는 물러서지 않고 계속해서 테이프 제출을 요구했다. 석 달이 지나도록 백악관이 응하지 않자, 10월 19일에는 법원에 닉슨 대통령에 대한 소환장을 발부해 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 국면에서 닉슨 대통령의 세 번째 실수가 발생했다.

특별검사의 담대한 행보에 화가 난 닉슨 대통령은 다음 날인 10월 20일, 토요일 저녁, 특별검사를 해고하라고 법무장관에게 지시했다. 그러나 법무장관이 이를 거부하며 사임했고, 법무차관도 역시 닉슨의 지시를 거역하며 사임했다. 결국 신임 법무장관이 특별검사를 해고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특별검사 해고 이후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대통령이 권력 남용과 진실 은폐를 시도하는 것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1974년 8월8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할 것을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1974년 8월8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할 것을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닉슨은 할 수 없이 타협안으로 테이프의 일부 편집본을 제출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이는 신뢰성 문제로 인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만시지탄이었다. 그 사이 1973년 11월에 새로 임명된 특별 검사는 테이프 제출을 압박하기 위해 대통령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이는 "미국 대 닉슨" 사건으로 불리며 법적 투쟁이 전개됐다.

결국 1974년 7월 24일, 연방대법원은 닉슨이 녹음 테이프를 제출해야 한다는 만장일치 평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대통령 특권이 사법부의 적법한 절차에 우선할 수 없으며, 중요 증거의 제출이 요구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대통령 또한 법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이다.

이 판결로 이 비밀테이프가 세상에 공개되었다. 워터게이트 사건 발생 후 2년 2개월째, 버터필드의 의회 청문회 증언 이후 13개월 만의 일이었다. 결국 닉슨 대통령은 테이프가 세상에 공개된 지 단 3일 만에 전국 방송을 통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하고, 다음 날 공식 사임했다.

이후, 공화당은 1974년 11월 중간선거에서 큰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하원에서 48석, 상원에서 4석을 잃었으며, 4개의 주지사 자리도 민주당에게 빼앗겼다. 하원에서 민주당은 291석을 확보해 대통령의 거부권을 무력화할 수 있는 3분의 2 이상의 다수 의석을 차지했고, 상원에서도 61석을 확보해 압도적 다수당 지위를 차지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한 정치적 신뢰 상실이 이러한 결과의 주요 원인이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교훈

 

▲ 윤석열 대통령이 22일 서울 서초구 대한민국학술원에서 열린 개원 70주년 기념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2024.5.22 ⓒ 연합뉴스
▲   윤석열 대통령이 22일 서울 서초구 대한민국학술원에서 열린 개원 70주년 기념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2024.5.22 ⓒ 연합뉴스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세 가지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첫째,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고 사건을 은폐하려했다. 둘째, 특별 검사를 해임하고 수사를 방해하려 했다. 셋째, 증거 제출을 거부하고 대통령 특권을 남용하려 했다. 이러한 실수들은 결국 닉슨 대통령의 사임으로 이어졌다.

윤석열 대통령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관련된 모든 사실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국민에게 솔직하게 설명해야 한다. 이는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신뢰를 잃은 정부는 모든 것을 잃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다음으로, 수사 과정에 개입하거나 방해하지 않아야 한다. 독립적인 수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채상병 특검을 포함해 본인과 가족 관련 특검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다. 경제 난국의 상황에서 이렇듯 엄청난 사회정치적 에너지를 특검 거부와 재의결 등으로 낭비해서야 안 된다. 그럴 여유도 없고 국민에 대한 도리도 아니다.

민주주의와 법치를 수호하기 위해 대통령 본인이 특검을 받아들여 통화 내용 등 관련 증거를 공개하고 법적 절차를 준수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통령 특권을 이유로 증거 제출을 거부하면 국민의 의심을 더 키우고 상황만 더 악화시킬 뿐이다. 이번 사태가 한국판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비화될지 말지는 오롯이 윤 대통령 본인의 결단에 달렸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너무도 정확히 그 길로 가고있다.

한편, 워터게이트 사건은 권력자의 권력 남용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행정부의 권력 남용을 견제하고 균형을 잡아주는 언론과 법원, 의회, 양심 있는 내부고발자 등의 역할이 필수적임을 일깨워준다. 특히 언론의 독립성과 탐사 정신, 양심 있는 공직자가 권력남용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데 필수적이다. 

진실은 결국 드러난다, 시간이 다소 걸릴지라도.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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